LOST를 보다가 나름대로 생존법칙 하나를 알게됬다. 건장하고 똑똑한데다가, 리더쉽에 인간적인 면모까지 두루 갖출 것 같은 미국인 의사 옆에 있으면 안전하다. 참, 영어를 모르면 무인도에서도 살아남기 힘들다. (주조연급 한국인 부부 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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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능력들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 류의 영화 보며 감동하는 집중력.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예측가능한 드라마를 '흥미진지'하게 볼 수 있는 현실 초월적 사고력.
'평범한 아줌마' 이거나 '커리우먼' 일 수 있는 변신능력. (가끔 대형마트에서 마주치면 서로 잘 몰라봄)
진짜같은 천원짜리 귀걸이를 낚아오는 시력과 민첩성. (가끔 천원짜리 같은 진짜 보석을 사오기도 한다. 대형사고.)
아버지 모르게 하나 둘 가전제품을 사는 은밀한 행동력.
사진을 스캔하기 위해 자던 아들을 깨우는 카리스마. (그냥 자기 전에 부탁하시지^^;)
'탄력적'이고 '유연한' 가계 운영 능력.
리모콘을 김치냉장고에서 4일간 숙성시키는 창의력. ('덜 익은 맛' 으로)
모든 음식. 퓨전의 대가. (김치찌개 - 김치된장아옥국 - 김치된장아옥청국장 - 김치된장아옥두부버섯콩비지 - No title. 230호 화합물)
난 이런 어머니를 보며 천방지축 귀여운 소녀를 떠올리곤 한다. 어머니는 소녀적 순수를 아직 갖고 계신다. 어쩌면 영원히 소녀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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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기쁨을 표현하는 수단이면서
슬픔을 감추기 위한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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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모든 것에 더 열등하다고 느낀다. 사춘기적의 그런 가벼운 푸념과는 다른, 세상 삶 가운데서 느끼는 아주 현실적인 열등감이다. 사실 이러한 열등감은 롤러코스터를 타는듯한 기분을 안겨주곤 한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어쩌면 당연한 자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자각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일 때, 사람은 열등감을 느낀다. 그리고는 골이 깊어져 결국은 체념하고, 무의식으로 그 문제를 넘겨버린다.
물론 지금의 나는 이 모든 열등감에서 해방된듯 하다. 신기하게 들리겠지만, 믿음이 깊어질 수록, 그러한 열등감은 사라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아직도 심한 열등감을 갖고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내 인생에 대한 유치한 푸념을 하기 시작했을 때,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아주 진솔하게 살아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치유되었거나, 아예 해탈해 버렸다고 자신했던 열등감에대해 그냥 체념하고있었던 것이다. 마치 고흐가 자화상에 자기 귀를 그리지 않아 결국 제 귀를 자른것 처럼, 감정의 동요를 막기위해 믿음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이상적인 자화상을 꾸민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열등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열등감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 자기가 열등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들보다 행복하다. 열등감이란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과정을 잉태하는 값진 선물이다. 설령 과정의 결과가 결코 돌이켜지지 않는 것이라 해도 아름답다. 하지만, 자기가 열등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들은 오히려 열등한 자들보다 더 슬프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등감이 없어졌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오로지 열등한 자신을 숨기고, 아니면 스스로 속이며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을뿐이다. 그들은 무의식 속에 열등함을 숨기고있다. 없는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을 뿐 행동으로 들어난다.
열등감은 마치 어슐러 르귄이 그의 소설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언급했던 그림자와 같이, 도망치려 할 때에 힘을 갖는다. 소설의 주인공, 게드는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다가 자신의 모든 힘을 잃고나서야 그것에 맞서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그림자와 정면으로 대면했을 때, 그 그림자는 게드와 하나가 되었다. 그림자에 맞선 다는 것은 그것을 싸워 이긴뒤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열등감을 피해 체념하거나, 상상의 나래를 펴고 공상속으로 도피하는 것은, 자신을 더욱 열등하게 만들고 마는것이다. 열등한 자의 궁색한 변명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듯, 벌레조차 될 수 없었던 한 열등한 자의 비애는 열등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그와 똑같은 열등감을 선사했다. 열등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모두가 열등하지 않다는 역설의 쾌재는 통하지 않았다. 모두가 열등하다. 다만, 그것을 극복하기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하다.
나는 열등하다. 너는 열등하다. 상대적이지만, 절대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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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대야에 하얀 컵을 넣고 후레쉬를 터트려 찍으면 이렇게 된다. 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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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전. 미국인 하나가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27살의 약간은 큰 키에 배가 좀 나왔고, 눈이 파랗고, 햄버거만 봐도 향수병이 도지는 미국인이다.
처음엔 모두들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호기심은 호기심일 뿐. 결국은 언어장벽이 너무 높다는 것과, 가끔씩은 문화마저 다르다는걸 알고 의도적으로 피하게 된다.
"영으어 해줘우. 영으어 피료우해이요우." 록헐트는 가끔씩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더듬거리는 생활영어들은 록헐트가 들으면 거의 유아들의 언어발달시기쯤의 말들로 들릴지도 모른다. "배고파" "힘들어" "아퍼" "안녕" =.=;; 자신을 처음본 한국인들이 항상 어눌한 발음으로 "어디서 오셨습니까?" 라고 묻는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록헐트가 매주 맥도날드나 던킨 도너츠로 향한다는게 그리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정체불명의 외국인이 동네 맥도날드에 자주 출몰해 알바들이 공포에 질려있다고 한다.)
나는 교회 예배를 끝내고 록헐트와 나란히 앉아서 집으로 오는 사상 초유의 경험을 여러번 했었다.
"오늘 어땠어요? o.o;;;" 나는 사색이 되어서 그렇게 말한다.
록헐트는 어딘가 초대를 받으면 항상 불고기가 나온다며 싫어하거나, 오늘 교회에서 있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영어다.)
문제는 내가 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을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남의 말을 들어주는 화법이 가장 좋은 화법이라지만, 너무 들어주는 것도 참.. 나 자신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요즘은 록헐트가 교회에 조금 적응이 되는지 교회 사람들에게 무수한 대쉬를 한다. (원래 장난끼가 많다.) 다들 이 파란눈의 새신자를 보면 도망친다. 그러면 그 새신자는 귀신처럼 그들을 쫒아다닌다.
나는 록헐트와 집에가는 방향이 같다는 이유로 록헐트 퇴치위원회에 자주 불려가곤 한다. 여러가지 민원들이 쏟아진다.
장난이 너무 심해.
옆에서 영어로 기도 해서 내 기도에 집중이 안돼.
식성 참 까다로워.
록헐트를 한국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게 록.퇴.위 의 주장이다. (그런데 록헐트 목에 방울다는 임무를 왜 나 주는건데;;)
아;; 또 다음주면 록헐트 옆자리에 앉아서 교회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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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학교를 간 아이들은 어둑해져서야 돌아왔다. "고래의전설 10장 13절!" 혼자 성경 구절을 중얼거리던 건이가 외친다. 제가 공룡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의 귀엔 ‘고린도전서’도 그렇게 들린다.
건이가 내게로 와서 묻는다. "삼촌, 일곱 살 중에 교회 데리고 갈 아이가 있을까?" "글쎄, 그건 건이가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친구 데려오면 스티커 주는데 스티커 모아오면 상 준대."
나는 그런 식의 판촉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김건에게 설명할 말을 한참 생각하다 접는다. 일곱 살짜리 아이가 알아듣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이거나 내가 그 문제를 설명할 능력이 없다. 건이는 이제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 열심히 그린다. 한 인물이 십자가에 달려있고 그 위론 횃불 같은 걸 죽 늘어놓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았다. "여자니?" "응." "예수님이야?" "예수님은 남자니까 이거 예수님 아니야...."
"건이야....." 나는 건이의 말에 조금 당황해 한다. 그래 맞다. 예수님은 남자다. 하지만, 건이는 예수님이 남자라는 사실 외에 더 큰 무언가를 단단히 배우고 왔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건이에게 물어본다.
"교회에서 예수님 그림 본적 있니?" "응." "어떻게 생겼지?" "머리길고.. 얼굴 하얗고.." "예수님 그릴 때 어떻게 그리는 게 좋니?" "머리길고, 얼굴 하얗고, 말랐고,..." "건이야.. 예수님 몸이 햇빛에 그을리거나 강도 같은 옷을 입고 있으면 안 되니?" "응! 성경학교가서 예수님 그리는데 선생님이 그랬어." 예기치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건이가 제 나이 일곱에 교회학교에서 무서운 걸 배우는구나. 그리고 나는 이 어린아이에게 그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한참을 생각한 뒤 입을 연다.
"건이야.. 예수님은 여자에겐 여자고 흑인에겐 흑인인 거야." "무슨말이야 삼촌?" "머리가 길고 얼굴이 하얀 예수님은 백인들이 자기 마음속의 예수님을 그린거야. 건이도 건이 마음속의 예수님을 그리면 되는 거야."
건이는 시무룩한 표정이다. 나는 더 해줄 말이 없을까 속으로 떠올려본다. '예수는 2천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김새는 흔히 우리가 테러리스트의 얼굴로 떠올리는 평범한 팔레스타인 사람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예수의 실제 얼굴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얼굴이다. 예수는 언제나 억압받고 슬픔에 빠진 사람의 편이었다. 예수는 남성이자 여성이며, 백인이자 흑인이며, 잘난 사람이자 못난 사람이다...'
그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나는 입을 다문다. 나는 내 마음속의 예수님을 건이가 따라오게 하는 것 보다, 건이가 제 마음속의 예수를 그려서 언젠가 그가 그린 예수님의 얼굴에 내가 감동받는 쪽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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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최고의 축복은 망각이다.
메모를 잘하는 방법에 관한 지식인을 보다가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뭔가 그럴듯한 말을 쓰는건 아니다!)
메멘토라는 영화를 봤다. 기록에 지배당하는 무책임한 한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주인공은 5분마다 기억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일상 생활의 모든것을 메모나 문신, 사진들로 남긴다. (정확히 5분은 아닐껄;) 그는 이 세상을 그가 써두었던 메모들로만 바라볼 수 있다. 한낱 포스트잇과 폴라로이드사진, "내 아내가 살해당했다." "범인을 찾아라." "그를 죽여라." 같은 고딕체 글자 문신들에 의존하는 것이다.
요즘들어 가끔씩 하늘을 쳐다볼 때면 메멘토의 주인공이 나에게 어느정도 투영되는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지거나, 상당히 우쭐해질때가 있다. (조울증은 아니다.) 메모에 조금씩은 의존하며, 약간은 집착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겠지.
메모의 위력은 상당하다. 메모는 삶이 꼬여버릴 수 도 있는 모든 시점들을 가지런히 정리해주고 착실히 알려주는 값싸고 가치있는 비서다. 가끔씩은 창의적이기까지 하며, 연인사이에 메모가 끼어들면 더 로맨틱해 보인다. (게다가 세상에서는 유일하게 주머니에도 들어간다.) 만약 메모가 없었다면, 나는상당히 많은 기회들과 시간들을 내 불완전한 기억에 의지하며 길에다 뿌려버렸을지도 모른다. 메모는 어떤면에선 신의 알림장 같다. 신의 계시를 메모로 받는다면 누군가 하얀병원에 날 데려갈까?
물론 스트레스 빼고 아직까지 메모로 받아본건 없다.
메모는 바나나 같은 존재이구나. (바나나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보자.)
우리는 기록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우리의 2% 부족한 기억을 채우려고 한다. 무언가를 항상 완벽하게 외우고 다닌다는 것은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거나, 아주 짜증스러운 일 일 테니까 말이다. 메모는 이러한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는 마약이다. '기억해야 할 것들'이라는 상당히 심오하고 추상적인 정신활동을 포스트잇과 볼펜 한 자루만 갖고도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반영구적인(30초 에서 한달, 또는 10년까지 자기 맘대로인) 기록으로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메모를 할 때, 더불어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일정한 부분까지도 기록하려는 욕심을 갖고있다.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못하거나, 혹시라도 잊어버릴것에 대비하려는 마음자세 때문이다. 차근차근, 또는 휘갈기며 메모지에 적어나간다. 일단 메모지에 적힌 '물리적인 기억들'은 이제 자신의 머릿 속에서 사라지거나 "나중에 메모를 확인할 것" 과 같은 단순한 암시로 바뀌어버린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외워야 할 것들'이 한 순간에 술술 날아가 버리고, 걱정이 없어진다. 메모를 자신의 기억력보다 더 믿는 것이다. (그게 정상이다.)
따라서 "메모는 기억을 잊지않기위해서 한다"는 말은 정말로 틀린말이다.
우리는 메모를 통해 우리의 기억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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