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의 딜레마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최고의 축복은 망각이다.  

메모를 잘하는 방법에 관한 지식인을 보다가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뭔가 그럴듯한 말을 쓰는건 아니다!)

메멘토라는 영화를 봤다. 기록에 지배당하는 무책임한 한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주인공은 5분마다 기억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일상 생활의 모든것을 메모나 문신, 사진들로 남긴다. (정확히 5분은 아닐껄;) 그는 이 세상을 그가 써두었던 메모들로만 바라볼 수 있다. 한낱 포스트잇과 폴라로이드사진,  "내 아내가 살해당했다." "범인을 찾아라." "그를 죽여라." 같은 고딕체 글자 문신들에 의존하는 것이다.

요즘들어 가끔씩 하늘을 쳐다볼 때면 메멘토의 주인공이 나에게 어느정도 투영되는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지거나, 상당히 우쭐해질때가 있다. (조울증은 아니다.) 메모에 조금씩은 의존하며, 약간은 집착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겠지.

메모의 위력은 상당하다. 메모는 삶이 꼬여버릴 수 도 있는 모든 시점들을 가지런히 정리해주고 착실히 알려주는 값싸고 가치있는 비서다. 가끔씩은 창의적이기까지 하며, 연인사이에 메모가 끼어들면 더 로맨틱해 보인다. (게다가 세상에서는 유일하게 주머니에도 들어간다.) 만약 메모가 없었다면, 나는상당히 많은 기회들과 시간들을 내 불완전한 기억에 의지하며 길에다 뿌려버렸을지도 모른다. 메모는 어떤면에선 신의 알림장 같다. 신의 계시를 메모로 받는다면 누군가 하얀병원에 날 데려갈까?


물론 스트레스 빼고 아직까지 메모로 받아본건 없다.


메모는 바나나 같은 존재이구나.
(바나나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보자.)


우리는 기록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우리의 2% 부족한 기억을 채우려고 한다. 무언가를 항상 완벽하게 외우고 다닌다는 것은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거나, 아주 짜증스러운 일 일 테니까 말이다. 메모는 이러한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는 마약이다. '기억해야 할 것들'이라는 상당히 심오하고 추상적인 정신활동을 포스트잇과 볼펜 한 자루만 갖고도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반영구적인(30초 에서 한달, 또는 10년까지 자기 맘대로인) 기록으로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메모를 할 때,  더불어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일정한 부분까지도 기록하려는 욕심을 갖고있다.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못하거나, 혹시라도 잊어버릴것에 대비하려는 마음자세 때문이다. 차근차근, 또는 휘갈기며 메모지에 적어나간다. 일단 메모지에 적힌 '물리적인 기억들'은 이제 자신의 머릿 속에서 사라지거나 "나중에 메모를 확인할 것" 과 같은 단순한 암시로 바뀌어버린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외워야 할 것들'이 한 순간에 술술 날아가 버리고, 걱정이 없어진다. 메모를 자신의 기억력보다 더 믿는 것이다. (그게 정상이다.)

따라서 "메모는 기억을 잊지않기위해서 한다"는 말은 정말로 틀린말이다. 


우리는 메모를 통해 우리의 기억을 잊어버린다.



by 잔별마루 | 2006/05/05 21:38 | about | 트랙백(3) | 덧글(12)
트랙백 주소 : http://nyct.egloos.com/tb/1848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이오공감의 흔적 at 2006/05/06 12:14

제목 : 2006년 5월 6일 이오공감
메모의 딜레마  by 잔별마루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최고의 축복은 망각이다. 메모를 잘하는 방법에 관한 지식인을 보다가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뭔가 그럴듯한 말을 쓰는건 아니다!) ...현금영수증  by 에타오늘 엄마랑 마트에 우유랑 주스를 사러 갔다. 우유가격은 1950원 주스는 1500원 사고 갈라고 하는데 엄마가 현금영수증 받으려면 5000원 채워야 한다고 또 사러 갔다. 그래서...경쟁자가 줄었음을 느낄 때.  by CiBi단체생활을 하다 보면, 아, 이 사람은 추후에 내 경쟁자가 되지 못하겠구나 하......more

Tracked from 기억나면 생각하는 건 .. at 2006/05/06 14:55

제목 : 이오공감: 메모의 딜레마에 빠지다.
2005년 5월 6일자 이오공감 잔별마루 님의 얼음집에서 한 조각 훔쳐왔습니다. : 메모의 딜레마 매번 콘서트가 다가올 때마다 전 초조해집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콘서트를 보고 올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기 때문이죠. 제가 다니는 팬 사이트에서, 전 후기를 자세하게 잘 쓰......more

Tracked from mEmOpAd at 2006/05/06 15:14

제목 : 과 유 불 급
임무수행으로 인해 제한을 받게 되는 특수한 환경때문에 군생활속에서의 관심사는 메모였다. 정말 하고 싶어 못견디는 것들을 당장에 머리속에서 떨쳐내고, 제한된 자유시간을 좀 더 잘 활용해보고자 시작했던 메모들.. 입대전에는 나름대로 PDA를 사용했던 적도 있고 컴퓨터를 이용했으나, 순간 순간의 기억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시나 최고의 메모도구는 연필과 종이뿐... 휴대용기기의 경우 기록을 시작하게 되면 손으로 적는 것보다 빠르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준비과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순간의 기억을 종이에 메모하는 속도를 따라......more

Commented by Kainslain at 2006/05/06 12:25
저도 메모를 자주 합니다. 가끔씩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도 나중에는 기억이 안 나거든요. 하지만 너무 글자를 휘갈려 쓰거나 간단하게 써서. 별 효느잉 없다는 소리가.. ( - 하지만 메모를 해도 종이를 잃어버려요;)
Commented by 루시아 at 2006/05/06 13:09
마지막 줄에 공감하고 갑니다. 잊지 않기위해서 메모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더군요. 얼른 어딘가에 기록해두고 마음 편하게 잊어버린게 다반사였던 것 같네요.
Commented by pink at 2006/05/06 13:13
우리의 기억이 메모에 의존하게 된다는 영화 메멘토가 보고싶습니다.
Commented by 아리안 at 2006/05/06 13:43
저도 며칠전에 메멘토라는 영화를 봤지요...결말에 완전 충격이었습니다만...
마지막줄은 저도 공감해요...어쩌면 우리는 망각을 하기 때문에 메모를 한다 하지만 결국 기억할 것을 하나 더 줄이기 위해 메모를 하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ㅇㅂㅇ
Commented by biolight at 2006/05/06 14:41
그래도 저는 메모의 위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메모를 통해 계획을 세우고
그 때 그 때 생각나는 많은 생각들을 정리해놓는다는것은
망각하는 동물인 인간에게는
괜찮은 발명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는 메모를 통해 우리의 기억을 잊어버린다'
라기 보다는
"메모는 기억을 잊지않기위해서 한다"가 더 와닿는군요
Commented by 아스냥 at 2006/05/06 14:56
이오공감에서 보고 왔습니다. 트랙백 신고할게요. ^^
Commented by liebemoon at 2006/05/06 18:02
이오공감을 통해서 왔습니다. 제게도 마지막 줄이 와 닿네요. 게다가 제 경우 더욱 곤란한 것은, 그 메모를 했다는 사실 조차도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 메모는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하는 용도로만 사용합니다. 제 기억도, 메모도 믿을만한 것이 통 없네요. T_T
Commented by 銀鳥-_- at 2006/05/06 18:28
저같은 경우엔 잊어버리기 때문에 메모를 하는 타입인지라.. 저는 제 기억력을 믿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주변이 하도 구박을 해 대서 믿을 수 없게 된거지만 말입니다.

그 메모를 어떻게 취급하느냐가 개인의 기억을 살릴수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요즘 대두되는 이런 류의 '디지털 건망증'은 사람들이 얼마나 '알아야 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지의 척도라고밖에, 저에겐 생각되지 않지만요.
Commented by 에타 at 2006/05/06 22:29
이오공감에서 보고왔어요^^ 마지막 줄이 공감이 가네요. 옛날에는 친구들 폰번호를 그냥 폰에다 저장해서 아빠 폰 번호도 기억을 못했는데 이게 군대를 들어가니까 폰을 못쓰니 하나 둘씩 외워지더라구요-_- 역시 핸드폰의 존재로 인해 제 기억이 망각된것 같습니다. 근데 예가 좀 이상한가;;
Commented by WizardKing at 2006/05/07 00:00
메모에 대한 어떤 책에서는, 메모를 한 뒤에 잊어라! 를 권하기도 합니다.
Commented by y   at 2006/05/07 01:03
옳은 말씀.
메모는 두뇌의 비상구.
Commented by 알약 at 2006/05/07 12:02
학교 다닐때는 메모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데 회사에 다니니 이것저것 할 것도 많고 기억할 것도 많아 메모는 필수가 되더군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산과 나무를 위한 사랑법
by 잔별마루
카테고리
전체
about
blog
photo
이전블로그
more...
이글루링크
최근 등록된 덧글
이런 그의 글을 보..
by 초하(初夏) at 09/08
뭐.. 페러디의 묘..
by 잔별마루 at 10/01
멋집니다!
by ArborDay at 05/08
학교 다닐때는 메모..
by 알약 at 05/07
김규향씨의 칼럼 '..
by 잔별마루 at 05/07
옳은 말씀. 메모는..
by y   at 05/07
메모에 대한 어떤 ..
by WizardKing at 05/07
아.. 이오공감으로..
by realjiny at 05/06
이오공감에서 보..
by 에타 at 05/06
저같은 경우엔 잊..
by 銀鳥-_- at 05/06
포토로그
rss

skin by teatime